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 (문단 편집) == 수사 ==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가 나타난 이후 목격자와 제보가 전혀 없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[[12월 31일]] 공개수사로 전환되었다. 하지만 그래도 성과가 없자 [[2008년]] [[1월 8일]]에 신고보상금을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으로 올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, 사건은 사실상 '''2달 동안''' 공백이 되었다. 실제로는 이 과정에서 수사가 부실하고 비합리적이었다는 수사 관계자의 내부 고백이 있었다.[* [[http://m.khan.co.kr/view.html?art_id=200803241505332&utm_source=urlCopy&utm_medium=social_share|관련 기사]], [[팟캐스트]] 방송 <[[프로파일러]] 배상훈의 CRIME> '안양 초등생 살인' 편 참고.] [[3월 6일]] [[어청수]] [[경찰청장]]이 원점에서 재수사를 지시함에 따라 재수사는 시작되었고 그 결과 [[3월 11일]] 오후 4시 경 경기도 [[수원시]] [[권선구]] 호매실동 [[호매실IC]] [[칠보산]]에서 [[동원훈련]] 중이던 [[예비군]]에 의해 암매장된 여아의 토막시신이 발견되었다. 실종 77일 만이었다. [[3월 13일]] [[국과수]]의 [[DNA]] 검사결과 시신은 이 양으로 확인되었고 이 양의 생환을 기다리던 이 양의 가족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다. 이에 따라 우 양의 생존 가능성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으며 [[3월 14일|그 다음날]]에는 경찰이 이 양의 집에서 130m쯤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던 정성현이 사건 당일 [[동안구]] 관양동 [[렌터카]] 회사에서 [[현대 쏘나타|뉴 EF 쏘나타]]를 빌렸다가 그 다음날에 반납한 사실이 확인되었고 해당 차량의 트렁크에서 혈흔을 채취하였다. [[3월 16일|이틀 후]], 혈흔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 양과 이 양이란 것이 드러나면서 두 어린이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. 당일 오후 9시 25분경에는 [[충청남도]] [[보령시]]의 어머니의 집에서 있던 용의자 정성현을 검거하였다. 정성현은 검거 당시에는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억울하다는 식의 말만 되풀이하였다. 이후 정성현은 "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후 당황하여 시신을 유기했다"고 말하며 진술을 번복했다. 그러나 경찰이 교통사고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거기다 혈흔 및 렌터카 대여 기록을 증거로 대면서 압박하자[* 경찰이 증거를 대었기에 범인이 자백한 것은 확실치 않다.] 3월 17일 낮 12시 범행을 자백했다. 그러나 자백 후에도 진술이 오락가락해 수사가 원활하지는 않았다. 예를 들면 사망이 확인되었지만 시신이 없어 실종 상태였던 우 양을 [[시화호]]에 묻었다고 하다가 다시 [[오이도]]에 묻었다고 하는 등 오락가락했다. 아무튼 [[3월 18일]] 정성현은 영장이 발부되었고 7시간 후 정성현이 사체를 유기했다고 지목한 경기도 [[시흥시]] 정왕동 군자천을 수색하던 해병전우회 한 회원이 오후 4시 43분경 군자천 군자7교에서 군자8교 사이 제2간선 수로에서 어린이의 시신이 돌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. 이어서 오후 6시경 상류쪽으로 1㎞쯤 떨어진 군자6교와 군자7교 사이에서 시신 일부를 추가로 발견했으며 오후 6시 30경에는 군자5교 인근에서도 찾아냈다. 실종 88일 만이다. [[3월 19일]] 국과수는 이 토막 사체들이 우 양이 맞다고 발표하면서 우 양의 사망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. [[3월 24일]] 오전 7시 50분경 [[시화호]] 군자천 주변 [[갯벌]] 지역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이것 역시 치아 구조와 DNA 분석 결과 우 양의 것으로 확인되었다. 정성현은 이 양의 시신은 토막낸 후 야산에 한 곳에 매장했지만 우 양의 시신은 군자천에 버리는 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진 것이다. 시신이 이미 발견되었던 이 양은 3월 17일 안양의 메트로병원[* 인산의료재단 산하의 종합병원으로 1983년 안양중앙병원으로 개원. 2002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.]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후 다음날 수원 연화장에서 [[화장(장례)|화장]]되었다. 우 양의 경우 시신 대부분이 발견되었지만 상반신 몸통 일부는 끝내 발견되지 않아 장례식이 늦어졌다. 부모는 '''‘시화호 물을 다 퍼서라도 예슬이 몸을 다 찾고 싶다’'''고 했지만... 끝내 찾지 못했다. [[4월 17일]] 오전 6시 50분경 관이 안양 메트로병원을 나와 모교인 명학초등학교에 도착했다. 모교에서 추모 속에 오전 8시 40분경 화장터인 경기 수원 연화장으로 가서 화장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